협회소식
[긴급 제언] 누가 혁신의 문을 열었나… '개척자'를 몰아내는 한국형 규제의 역설
관리자
2026.05.14 20:05
51
[긴급 제언] 누가 혁신의 문을 열었나…
'개척자'를 몰아내는 한국형 규제의 역설
법학박사 김성곤(Dr. iuris)
(사)한국블록체인산업진흥협회 상임부회장
한양대학교 공공정책대학원 겸임교수
시장은 스타트업이 열었다. 그러나 제도화의 열매는 기득권이 가져가고 있다. 한국의 신산업 정책은 늘 같은 장면을 반복한다. 시장이 없을 때는 스타트업에게 먼저 뛰어들라고 독려한다. 규제 샌드박스라는 이름으로 불확실성을 감수하게 하고, 제도 공백 속에서 시장의 가능성을 스스로 증명하라고 요구한다. 그런데 정작 시장이 열리고 법제화가 시작되면,
가장 먼저 길을 개척한 스타트업부터 밀려난다. 혁신은 스타트업이 하고, 수확은 기득권이 챙기는 구조다.
부동산 STO 시장만 봐도 그렇다. 소액으로도 상업용 부동산 투자에 참여할 수 있게 한 아이디어는 대형 금융사가 아니라 펀블과 루센트블록 같은 초기 스타트업이었다. 다윈KS 역시 부동산 STO와는 다른 분야이지만, 외국인 대상 디지털 자산 환전이라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한 혁신 기업이었다. 업종은 달라도 이들의 공통점은 분명하다. 제도가 없을 때 먼저 위험을 감수했고, 불확실성 속에서 시장의 가능성을 입증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정작 제도가 만들어지는 순간, 이들 개척자는 보호는커녕 규제의 칼날 앞에서 퇴출당하거나 외면되고 있다. 이쯤 되면 이는 제도화가 아니라 사실상의 ‘퇴출 설계’다.
루센트블록 사례는 제도화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수년간 샌드박스를 통해 STO 시장의 가능성을 검증하고 이용자 기반을 쌓아온 대표적 사업자는 조각투자 장외거래소 예비인가 심사에서 넥스트레이드(NXT) 컨소시엄과 한국거래소 컨소시엄(KDX)에 밀려 탈락했다. 시장이 없을 때는 스타트업의 실험이 필요했고, 시장성이 확인되자 그 자리는 대형 플레이어의 몫이 됐다. 시장을 개척한 원주민은 밀려나고, 자본과 조직을 갖춘 후발주자가 제도권의 문을 통과하는 구조라면, 한국의 산업정책은 혁신 육성이 아니라 기득권 편입 프로그램에 가깝다. 루센트블록이 고객 보호와 서비스 연속성을 위해 발행 인가를 우선 신청하고, 지배구조 문제 등을 보완해 유통 인가에 다시 도전하겠다고 밝힌 것은 높이 평가할 일이다. 그러나 개척자가 ‘7전 8기’를 다짐해야만 겨우 생존을 논할 수 있는 시장이라면, 그 제도는 이미 실패한 것이다.
펀블은 더 노골적인 규제의 모순에 갇혔다. 금융당국은 비금전신탁 기반 조각투자 사업을 제도권에 편입하겠다며 ‘수익증권 투자중개업’ 인가를 요구하고, 최소 자기자본 10억 원을 제시했다. 겉으로는 투자자 보호를 위한 기준처럼 보인다. 하지만 스타트업 현실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이것이 얼마나 무책임한 조건인지 금세 드러난다. 초기 혁신 기업이 10억 원 자본금을 마련하려면 벤처캐피털 투자가 필수적이다. 그런데 인가를 받는 순간 금융회사로 분류돼 VC 투자가 사실상 막힌다. 인가를 받으려면 투자가 필요하고, 인가를 받으면 투자가 끊긴다. 이건 제도가 아니라 덫이다. 투자자를 보호하고 시장의 질서를 세운다는 명분 아래, 실제로는 스타트업이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장벽을 세워 퇴출을 유도하는 셈이다. 펀블이 파산 수순에까지 몰린 것은 사업 모델이 시장에서 외면을 받은 때문이 아니라, 규제가 현실을 외면한 결과다.
다윈KS 사태는 한국형 규제 행정의 무능과 무책임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다. 다윈KS는 외국인 관광객이 보유한 가상자산을 비대면 실명인증을 거쳐 원화로 출금하거나 선불카드에 충전할 수 있는 서비스를 내놓았고,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규제 샌드박스 승인까지 받았다. 정부를 믿고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금융위 산하 금융정보분석원(FIU)은 이를 돌연 ‘미신고 불법 사업자’로 규정하고 고발했다. 한 부처는 혁신을 하라고 승인해 놓고, 다른 부처는 같은 사업을 불법이라고 낙인찍었다. 이것이 지금 한국 규제 행정의 실상이다. 더 황당한 것은 단기 체류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서비스에 국내 은행 실명확인 입출금계정을 요구했다는 점이다. 3~4일 머무는 관광객에게 시중은행 계좌를 개설하라는 요구는 규제가 아니라 사업 포기 명령에 가깝다. 결국 과기부의 샌드박스 승인증은 규제 부처인 금융위 앞에서는 아무 효력도 없는 한낱 ‘종잇장’에 불과했다.
문제는 이 모든 일이 예외가 아니라는 점이다. 한국의 규제는 새로운 산업을 키우는 대신, 기존 산업의 잣대를 들이대 신산업을 줄 세우는 데 익숙하다. 불확실한 시기에 시장성을 증명하는 것은 스타트업이지만, 정작 제도화 단계에서는 대형 금융사와 같은 기득권 기준으로 심사를 받는다. 부처마다 해석은 다르고, 규제는 충돌하며, 책임지는 곳은 없다. 그러니 개척자는 소모되고, 시장은 결국 자본력 있는 후발주자 중심으로 재편된다. 이것은 공정이 아니다. 혁신을 미끼로 스타트업을 불러낸 뒤, 판이 커지면 밀어내는 구조적 불공정이다.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핀테크 기업이 금융업 인가 과정에서도 VC 투자를 받을 수 있도록 예외 규정을 즉시 마련해야 한다. 외국인 대상 서비스에는 실명계좌 일변도의 낡은 규제가 아니라 e-KYC 같은 실효적 대체 수단을 허용해야 한다. 규제 샌드박스 승인과 타 부처 규제가 충돌하지 않도록 범정부 차원의 조정 권한도 실질적으로 강화해야 한다. 지금처럼 시장을 먼저 연 기업이 제도화 과정에서 가장 먼저 탈락하는 구조를 방치한다면, 앞으로 어떤 스타트업도 불확실한 신산업에 선뜻 뛰어들지 않을 것이다.
혁신의 문은 스타트업이 열었다. 그런데 제도화라는 과정에서 기득권만 살아남는 구조라면, 그것은 제도화가 아니라 혁신의 탈취에 불과하다. 정부가 진정으로 신산업을 육성하고자 한다면, 척박한 시장을 개척한 스타트업을 규제 샌드박스의 실험용 소모품으로 전락시키는 정책부터 끝내야 한다.
출처 : 핀테크투데이(http://www.fintechtoday.co.kr)
기관 홈페이지 : https://www.fintech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749